재판연구관의 실수
재판연구관

나는 초임 부장판사로서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약 1년 7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2002년 2월 18일자로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부임하였다.
대법원은 12인의 대법관이 4인씩 3개부를 이루어 재판을 하고 대법원장과 12인의 대법관으로 이루어진 전원합의체가 있다. 대법원에는 대법관의 재판을 실무적으로 도와주기 위하여 법령과 판례의 조사․연구에 종사하는 재판연구관이 수십 명 근무하고 있다. 내가 연구관 생활을 마칠 때인 2004년 2월에는 대법관 실에 전속된 재판연구관 36명과 공동연구관을 합하면 총 60명이나 되었다. 요즘은 100명이 넘어섰다.
2001년 2월 이전에는 각 대법관 실에는 고등법원 배석판사를 마친 법조경력 약 13년 정도 되는 중견법관 2명이 전속으로 배치되어 사건에 대한 연구검토를 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대법원 재판연구관 실이 운영되었다. 이들 연구관은 약 2년 정도 근무하면서 전국 각지의 법원에서 올라오는 상고심 사건기록을 무수히 검토하고 출중한 대법관의 지도를 받을 고귀한 기회를 얻게 되어 상당한 실무능력이 축적된 다음 일선법원의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진출하여 배석판사들을 지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나처럼 재판연구관을 거치지 못하고 합의부 재판장이 되면 배석판사로부터 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대법관 실에 근무하는 재판연구관을 흔히 전속연구관이라고 하고, 그밖에 공동연구관 실도 있다. 이들은 행정조, 조세조, 특허조, 상사조,민․형사조 등으로 전문분야가 나뉘어 있고, 각 조장은 지방법원 부장판사 급이 맡고 있으며, 연구관 몇 명씩이 배치되어 사안이 복잡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사건을 검토하고 그 조 내에서 토론을 거쳐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공동연구관 실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급 법관 2인이 수석재판연구관과 선임재판연구관으로 있으면서 분야별로 총괄을 하고 있다.
그런 체제로 운영되다가 전속재판연구관 실에 부장판사 1명씩을 보강하기로 하고, 우선 2001년 2월 정기인사 때에는 지방법원 부장판사로서 일선에서 근무한 법조경력 16년의 법관 6명(사법연수원 14기인 이기택, 강일원, 김상철, 최상렬, 임준호, 박철 부장판사)을 전속재판연구관으로 발령을 내어,12인의 대법관 중 우선 6분의 방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전속연구관은 대법관당 2명이었다.
내가 연구관으로 간 2002년 2월에 나머지 대법관 실에도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보충되면서 전속연구관은 3명으로 늘게 되었다. 그 때 부장판사 1명이 연구관이 된 지 1년 만에 사직하는 바람에, 지방에서 일선 근무를 하던 사법연수원 15기 동기 부장판사 7명이 전속연구관으로 발령을 받아, 부장판사가 없는 대법관실에 배치되었다. 나와 김광태, 문용선, 박순성, 한범수, 김상준, 황병하 부장판사다. 김광태, 박순성, 김상준 부장과 나는 고등법원 판사 시절 2년간 법원행정처에서 각각 기획담당관, 법정심의관, 인사1담당관, 송무심의관으로, 문용선 부장은 사법연수원 교수로, 한범수 부장은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으로 각각 근무하여 대법원 재판연구관 근무가 처음이었고, 황병하 부장은 1년 만에 다시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복귀하였다. 그렇게 하여 2002년 2월 18일부터 대법관실 전속연구관은 부장연구관 1인과 연구관 2명으로 팀이 이루어져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재판연구관에게 맡겨진 조사․연구라는 것이 사실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나 진배없다.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법원도서관의 종합법률정보, 재판연구관 보고서 검색시스템, 하급심 판결관리시스템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미국의 판례도 검색할 수 있을 정도로 전산화가 잘 되어 있기는 하지만, 연구관에게 역시 가장 두려운 것은 종전 판례 검색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으로 잘못된 연구보고서를 제출하는 경우이다.
결과적으로 판결의 저촉이라도 발생하면 연구관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언론에 보도까지 된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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